주일예배강설

디모데전서 1장 3-6절

by 최승덕 posted Jan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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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승구 목사
성경본문 딤전 1:3-6
설교날짜 2026-01-18

딤전 1:3-6 (3)

이승구 목사님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주에 디모데전서 1장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으로 1세기 교회든 21세기 교회든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입니다. 온 세상 역사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경륜이고 뭐고 그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정도만 가지고 삽니다. 어린 교회의 모습이죠. 제대로 된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의식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전하는 교훈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타인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사랑을 우리 가운데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결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그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런 곳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극단적인 질문을 던져볼 만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삼각형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원칙적으로 청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청결하지 않은 부분이 있죠. 그래서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은 언제 온전히 청결하게 될까요?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 갈 때, 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미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선한 양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결한 마음과 마찬가지로, 선한 양심도 교회 공동체 내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를 없애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는 우리말 성경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가 아닌 진짜 믿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른 교훈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랑은 이렇게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다룰 주제

오늘은 동일한 본문으로 좋은 내용을 감싸고 있는 다른 요소들을 통해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따라서 지난주에 이야기한 내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부정적인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디모데가 해야 하는 일

먼저 상황을 파악해 봅시다. 바울은 자신이 마케도니아로 갈 때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라고 권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이 이를 아주 잘 번역했습니다. 이와 대조되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해야 한다"라는 구절에서 '명하여'입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에게 바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바울은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그건 바울의 의견이고...' 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에게 바울은 “여기까지는 주님의 말씀이고, 여기서부터는 나의 의견이다”라고 말할 때, 그 ‘나의 의견’도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로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도는 열세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포함하여 열세 사람인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했습니다. "당신이 여기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좀 해야 되겠다." 권한 것이죠. 그러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에게 명령해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것은 권유한 정도이고,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명령하는 것입니다. '명령하다'라는 말은 군대 용어인데 일부러 그 용어를 쓴 것입니다.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교훈

교회 공동체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은 없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디모데전서는 63-65년 사이에, 에베소서는 62년쯤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먼 시간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런데 벌써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분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주 강력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다"라는 말은 한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헤테로디다스칼레오)'라고 합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다' 또는 '다르게 가르치다'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가르친다'는 말이 가르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가르치는 방식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바른 교훈만 가르치면 됩니다. 바른 교훈은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며, 특히 합신이 그렇습니다. 합신은 이런 말씀의 교훈을 그대로 가져와서 학교가 세워질 때부터 '바른 교훈'을 첫 번째로 강조해 왔습니다. 바른 교훈은 바른 생활을 하게 하고, 바른 교회를 만들죠. 그래서 합신은 언제나 이 세 가지를 교훈처럼 강조해 왔습니다. 이 교훈은 어떤 사람이 작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학교가 세워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 바른 교훈과 대조되는 것이 잘못된 교훈, 즉 다른 교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잘못된 교훈을 따르게 될까요? 본문을 통해 이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

4절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몰두하다’는 희랍어로 ‘προσέχω(프로세코)’입니다. ‘προσ-’는 ‘~을 향하여’라는 뜻이고, ‘έχω’는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합하면 ‘~을 향하여 가는 것을 붙잡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이 이를 ‘몰두하다’라는 단어로 잘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몰두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시기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것에 몰두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에 몰두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위해 결국은 성경 자체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1세기 에베소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습니까?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1세기에 발전하기 시작해서 2세기에 현격하게 나타난 영지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초기 영지주의자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분인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자꾸 나온다고 이해했고, 그것이 곧 창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창조론인 것이죠. 그래서 나중에 가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들 중에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은 선한 것이고 멀리 있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이상한 이해도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라는 게 이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이때 ‘유출’, ‘발출’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그런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를 유대화 하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율법의 선생”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이 율법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혹시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두 연관시키려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두 가지가 혼합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가장 적절한 이해라고 봅니다. 물론 더 정확한 것은 나중에 하늘에 가서 바울 선생님께 여쭤보아야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하신 신화와 끝없는 족보라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우리로서는 앞서 말한 두 가지가 합쳐진 형태의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유대교의 율법에 근거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하긴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이야기가 아닌 쓸데없는 이야기, 곧 사변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1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않고 사변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지난주에 말했던 궁극적인 목적인 참된 사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6절). 목표 또는 목적지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목표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에서 벗어나면 단순히 벗어나기만 하는 걸까요? 동시에 옆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잘 어울리는 우리말이 있죠.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입니다. 부산을 목적지로 삼고 하는 말로, 부산을 향해서 잘 가다가 갑자기 옆길로 빠져서 '삼천포'라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죠. 여기서도 가야 할 목적지로부터 벗어나서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으로 가득 찬 상태를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 "그러면 난 이제 말을 하나도 안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봅니다. 말을 하되,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으로 가득 찬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지 않을 때,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해서 바로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디모데를 권위 있는 위치에 세우는 바울

그런데 디모데는 젊은 목회자입니다. 디모데가 교인들에게 강하게 명령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겠죠. 명령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듣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를 권위 있는 위치에 세웁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이지만, 동시에 에베소 교회 전체에 보낸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 먼저 디모데가 읽은 후, 어느 날 예배 시간에 함께 읽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디모데는 바울보다 권세가 적어 보이지만, 같은 권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일을 합니다.

 

다른 교훈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잘못된 가르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무엇에 몰두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1세기에 잘못된 가르침을 전한 사람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했습니다. 무엇인가에 몰두한다는 것은 '열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열정으로 교회를 망치는 것입니다. 자신만 쓸데없는 것에 몰두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도록 교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에베소 교회에 사도 바울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다른 말씀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바울이 이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적 가르침에는 충실해야 합니다. 1세기 교회, 2세기 교회, 3세기 교회, 16세기 교회, 21세기 교회 모두 그 사도적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특히 16세기 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에서 멀어졌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특히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도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이죠. 우리 시대에도 이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교회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사도적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바울이 그런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디모데를 그곳에 머물게 하여 목회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잘못된 가르침과 다른 교훈이 명확히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이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분별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잘 분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에 몰두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몰두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사람들 중 일부가 잘못된 것에 몰두해서 문제가 되었군요. 보세요. 몰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공부하라고 하지 마세요." 이것이 천주교회의 모습입니다. 현재 교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몰두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면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말을 선거운동 구호로 내세웠겠습니까? 당시 미국이 겪고 있던 불황 문제를 꺼내면서 선거 양상을 바꿔 놓은 것이죠. 상당히 많은 사람이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조금 괜찮아지면 어떤 문제에 몰두할까요? 건강 문제에 몰두합니다. 한동안 우리나라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부자 되세요! 부자 되세요!” 하다가 상황이 조금 괜찮아지니까 온 세상이 ‘웰빙(Well-being)’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병에 걸려 어렵고 힘들면 건강이 회복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모든 정황 가운데서 그 두 가지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안락과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삶이 평안하지 않으면 정신이 산란해지고, 그렇게 되면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그렇지 않은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에 몰두하지 않으면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막 싸웁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 사이에는 영적인 전투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길은 딱 두 가지입니다. (1)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 그리고 (2) 어느 것이 사랑을 더 많이 하는 결과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적 가르침을 강조하는데 절대로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성경적이고 옳은 것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교회는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장차 하늘에서 주님의 뜻대로 진전해 가는 일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이 제대로 이루어질까요? 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그 토대를 잘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대들도 그 토대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면서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에 따라 몰두합니다. 어떤 때는 경제 문제, 어떤 때는 웰빙 문제, 나라가 복잡하면 사회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삼천포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몰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해 나가려고 하실까? 하나님의 경륜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결과, 궁극적인 목적인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잘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골몰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온갖 좋은 말을 해도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맙니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은 성령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애를 써서 그 방향을 향해 가야 합니다. 이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전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잘못된 것들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이런 일을 왜 하는 것입니까? '잘못된 것을 배웠으니 잘못되자!'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잘못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것을 잘 알기 위해 잘못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이상한 것에 집중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때 제가 낸 책 제목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낸 책 가운데 『묵상과 기도, 생각과 실천』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묵상과 기도를 제대로 하면 바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묵상과 기도에 근거하지 않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이죠. 기독교적인 생각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독교적 생각은 그저 생각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만 큰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적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묵상과 기도, 생각과 실천』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같이 기도하시죠.

 

 

기도

거룩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에베소 교회가 처한 상황을 잘 알게 하시고, 그 상황 가운데서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가 어떻게 성도들을 인도해야 하는지, 어떤 잘못된 교훈을 가르쳐서는 안 되는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하옵나이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